[ 논댁닷컴=고라니]결혼을 준비하다 보면 오백 개가 넘는 업체를 만나게 된다. 웨딩홀부터 시작해 허니문여행사, 드레스샵, 혼수업체,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사이버머니처럼 쓰는 기분은 제법 짜릿하다. 하지만 소비자로서 결혼시장에 참여하는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린 곧 불편한 진실에 직면한다.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결혼시장과 별개로또 다른 결혼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곳에서 우린 상품으로 가판대에 진열된다.사내 게시판에 결혼소식이 올라오면 당사자들은 꼭 이런 질문을 받는다
[청년칼럼=고라니]결혼 직후 우리 부부는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공공기관 2차 지방이전을 추진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정부는 수도권에 남은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보낼 거라 선언했고, 우리가 계획했던 것들은 백지가 되었다.아내는 서울에, 나는 충북혁신도시에 있는 공공기관에 다닌다. 서로 직장이 멀어 결혼을 준비하는 단계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오랜 고민 끝에 신혼집은 수도권에 구하기로 했다. 아내는 지옥철로 나는 통근버스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아내는 무더위에도 KF94 마스크를 꽁꽁 싸매고 지하철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허리
[청년칼럼=고라니]여자친구가 물었다. "오빠도 결혼하면 남의편 될 거야?" 장난스런 말투였지만 가볍게 넘길 말은 아니었다. 서로 세상에 하나뿐인 '내 편'이 되어주자며 결혼을 약속했는데 남의 편이라니. 있어선 안 될 일 아닌가. 문제는 있어선 안 될, 그 일이 자연스레 내 일이 될 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남의편'은 험난한 시월드 안에서 아내를 보호하지 못하고 시부모에게 휘둘리는 줏대 없는 남편을 뜻한다. 시월드는 옛말이라지만 형태를 달리해 여전히 번영하고 있는 현실 속 세계다. 20년 전 며느리가
[청년칼럼=고라니]공무원이 숨졌다. 코로나 비상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지 나흘 만이었다.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에도 휴일을 반납하고 비상근무를 해오던 공무원이 자택에서 사망했다. 이들을 죽게 한 건 전염병도, 사고도 아니었다.'일'이었다.앞에 '공'자가 붙은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는 남의 나라 얘기다. 국가적 재앙 앞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노출시켜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마비되는 걸 막기 위해 국가는 자신의 손과 발을 망설임 없이 굴린다. 피와 살이 터져도 괜찮다. 다친 자리
[청년칼럼=고라니] 나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을 복수전공했는데, 아버지는 주변에 아들이 경영학과에 다닌다고 얘기하곤 했다. 사회학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걸로 짐작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해도, 사회학 공부는 즐거웠다. 우리가 살며 당연시하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믿음일 뿐이고, 따라서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학 거장들은 내 아이돌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최소한 양면적임을 전제하는 사고방식도 매력적이었다.교수님 중에 무시무시한 학자가 있었다. 학문의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신혼집 정보를 얻으려고 부동산 단톡방에 들어와 있다. 관심 있는 세 지역의 커뮤니티인데, 각각 1000명 정도의 대규모다. 지역 정보, 부동산 정책 기사, 심지어 맛집 추천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한 시간 정도 관심을 끄고 있으면 수백 개가 넘는 톡이 쌓여 있다. 재야의 고수들이 많아서, 처음 집을 구하는 나 같은 초짜들에게 유용한 조언을 주기도 한다.어느 저녁에도 단톡방을 보고 있었는데, 링크 하나가 공유됐다. 유명 연예인이 자살했다는 기사였다. 그걸 보고 누가 이렇게 말했다. "청담동엔 악재네요.
[청년칼럼=고라니] 요즘 팀장들을 보면 가끔 짠할 때가 있다. 온갖 더러운 꼴 다 보고 그 자리까지 갔는데, 막상 대접 받을 때가 되니 요즘 것들은 단체로 미쳐 돌아간다. 6시가 되면 팀장이 남아 있든 말든 쌩 까고 퇴근하고, 해외여행 간다며 연차를 대여섯 개씩 연달아 낸다. 조금만 지적해도 갑질한다고 블라인드에 글을 올려대니 환장할 지경이다.이들은 조직의 악습을 개선해 왔다고 나름 자부했다. 회식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이고, 노래방 뒤풀이도 없앴다.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직원들의 의견도 경청했다. 점심도 자주 사줬다. 박봉에 인
[청년칼럼=고라니] 버스를 놓친 경험은 한 두 번이 아니다. 내 장이란 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주했다. 불길한 감각이 배를 스치고 지나가면 머리는 빠르게 굴러간다. 약속시간 전까지 공용 화장실에 들를 수 있는 최적의 경로와 여유시간을 계산하는 것이다. 작은 징후는 순식간에 속을 쥐어짜는 고통으로 자라고, 식은땀을 흘리며 가까운 화장실로 한 발 한 발 위대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해 화장실을 또 가게 되면 버스는 이미 떠나 있기 일쑤다.과민성대장증후군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붙어 다닌 병명이다. 처음에는 단
[청년칼럼=고라니] 첫 만남은 언제나 뻘쭘하다. 새 학년, 새 동아리, 새 학교 첫 날마다 난 쥐구멍을 찾기 바빴다.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극도의 어색함을 견디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유난히 한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덩치가 큰 그 선배는 걸음이 느리고 행동이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우린 어쩌다 같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그는 “아까 나 보고 놀랐지?”라며 자신이 중증 뇌병변장애를 가졌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말이 느려도 이해해 달라며. 1년 늦게 입학한 나와 한 학번 위인 그
[청년칼럼=고라니] 세계여행. 이 네 글자만 들어도 가슴 뛰던 시절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먹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난 사는 게 힘들 때마다 어딘가 떠날 생각에 위안을 얻곤 했다. 에딘버러에 눌러 앉아 남성용 전통치마를 입고 거리를 활보할 거라든가, 에 나온 장소들을 영화 속 시간 순서대로 가보겠다는 꿈에 부푸는 식이었다. 얼마 전 친구 한 명이 3년 반 다닌 회사를 관두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갑작스런 결심은 아니었다. 그는 입사할 때부터 여행경비가 모이면 바로 사표를 낼 거라 이야기하
[청년칼럼=고라니] 우리 회사에 두꺼비를 닮은 임원이 새로 왔다. 작년 말 임명된 외부 출신 변호사인데 동글동글한 외모에 항상 웃는 얼굴이 호감형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이 분에 대한 안 좋은 평이 점점 늘었다. 고집이 세고, 매번 강제로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하는데다가, 월급은 제일 많이 받으면서 아랫사람한테 커피를 얻어먹는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 밑에서 일하는 동기의 불평불만을 들으며 ‘첫인상이랑 많이 다른가보네.’ 싶었는데, 우리 팀 소관 임원이 갑작스레 퇴직하며 나도 이 분 밑에서 잠시 일하게 됐다. 세간의 평가
[청년칼럼=고라니] 공포의 합평회 날은 죽지도 않고 또 왔다. 벚꽃 날리는 캠퍼스 벤치에 앉아 시를 읽는 낭만을 기대하며 문학회 문을 두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우리 문학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각자 써 온 시와 소설, 에세이를 공유하고 감상평을 나누곤 했다. 말이 좋아 합평회지, 한 마디로 씹고 뜯고 맛보는 자리였다.평가는 잔혹했다. 짝사랑하는 이를 그리며 쓴 누군가의 시는 “이런 건 니 페이스북에나 올려”라고 평가받았고, 어떤 선배가 한 학기 내내 쓴 단편소설은 라면냄비 받침으로 쓰면 딱 좋겠다는 소리나 들었다. 나도 용기 내서 한
[청년칼럼=고라니] 그 때 그 귀여운 아저씨는 신도림역 9-4번 플랫폼에 서 있었다. 늦은 저녁, 동인천행 급행열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저 멀리 누군가 양 팔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중년의 아저씨가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멋쩍었는지 아저씨는 곧장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후 열차가 도착했고, 아저씨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라졌다. 핸드폰 화면에 담겨있던 그의 푸근한 표정이 떠오르며 집에 가는 내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청년칼럼=고라니] 청년실업 문제는 내가 취업준비를 하던 2015년에도 최악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의 선배가 취업준비를 할 때도, 그 선배의 선배가 취업준비를 할 때도 청년실업률은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 함께 고공행진 했다고 한다. 그 덕에 블라인드 채용이나 공공기관 지역인재 채용할당제와 같이 취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이슈들 말고도 유가 급락, 소비심리 하락, 심지어 재벌 총수의 실형 선고까지 모든 소식이 내 일자리를 빼앗는 비보로 느껴지는 예민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어느 날엔가 도서관에서 인적성 문제를 풀다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직장인이 되기 전에도 시간은 소중했다. 첫 애인과의 첫 다툼도 시간 때문이었다. 픽사의 명작 '월-E'를 보기로 한 날 약속시간이 다 되도록 애인이 연락두절이었다. 영화 시작시간 5분 전에야 방금 일어났다며 문자가 왔고, 나는 그냥 혼자 영화를 봤다. 지금 같으면 카페나 서점에서 상대를 기다렸다가 제대로 사과를 받고 감정을 풀었겠지만, 10년 전의 난 그런 처신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내 시간을 존중받지 못하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었다.그토록 소중했던 나의 시간은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매일 아침 7시, 사당역 10번 출구 앞은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서늘한 입김으로 가득하다. 피곤한 몸을 버스에 싣고 두 시간 가량을 좁은 의자에서 보내야 하는 이들이다. 가끔 운이 좋아 옆자리가 빌 때도 있지만 보통은 빈자리 없이 빽빽하게 앉아서 간다. 세상 혼자 사는 쩍벌남이 옆에 앉기라도 하는 날에는 몸이 닿는 불쾌한 느낌에 선잠도 들지 못한다.통근버스로 출퇴근한다는 말에 천진한 친구들은 달달한 로맨스를 떠올리며 눈을 반짝이기도 한다. 아마 종착지가 스키장이나 놀이공원이 아니라 사무실이라는 사실을 간과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한 친구가 있다. 동시에 같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우리는 학교에서 놀다가, 밖에서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각자의 집에서 스타크래프트에 접속하곤 했다. 약도 없다는 중2병에 걸렸을 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민망한 글들을 경쟁적으로 싸이월드에 올렸다. 공부가 급해진 뒤에는 집 앞 독서실에서 새벽에 함께 돌아왔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수험생)에 가까웠던 우린 「개념원리」 책의 예제, 연습문제, 심화문제를 풀며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괴성을 지르곤 했다. 곤히 주무시다 난데없이 들려온 소음에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스물 두 살의 봄날, 횟집에서 고등학교 선배들을 만났다. 나를 포함해 대학생이 네 명에 은행, 자동차회사, 공공기관 등 다양한 직종에 몸담은 이들이 열댓 명이었다. 눈치 보지 말고 시키라는 선배들의 호령에 광어 대신 참돔을 주문했다. 소맥에 이어 팔자에도 없는 위스키로 2차를 달리고 반쯤 정신이 나가 있을 무렵, 갑자기 누가 옷을 갈아입으라고 재촉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정신을 차려보니 선배 몇 명이 가운을 입고 웬 방에 앉아 있고, 벽에는 처음 보는 여자들이 서 있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나는 서둘러 그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한 정치인의 “이부망천” 발언으로 일상에 전념하던 부천, 인천 시민들의 어안이 벙벙했던 적이 있다. 이혼하면 부천에, 망하면 인천에 산다는 말인데 몇몇 시민들은 그 정치인을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그럼 인천에서 나고 자란 난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망한 인생이라는 거냐’라는 생각에 피식하긴 했지만 분노나 모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혼했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낙오자로 치부하고, 이를 특정 지역의 보편적 특성으로 일반화하는 무례하고 게으른 사고방식이 놀라웠을 뿐이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피니언타임스=고라니] 체코 프라하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 작은 도시 호테르보르시(Chotěboř)에 베네딕투스 공동체(Community Housing Benediktus)가 있다. 이곳은 지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 사는 작은 NGO다. 10명 남짓의 공동체 사람들은 두 채의 건물과 넓은 마당에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같이 논다.매일 아침 8시에 전체회의가 열린다. 거창한 자리는 아니다. 어젯밤 창문을 열고 자는 바람에 감기기운이 있다거나, 저녁식사 후에 새로 산 보드게임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최근